'생명' 넘어서는 가치는 없어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는 극단적 삶을 선택했던 자살자들의 개인 윤리적 문제보다 사회적 문제를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학자들도 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사회적 아노미(anomie)상태에 놓여있을 때 자살은 위기나 어려움을 탈출하는 또 다른 시도"라고 말한다. 혼란스러운 사회가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자살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생명을 넘어서는 가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나 가톨릭 등 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종교마다 조금씩 다르다.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개인이 마음대로 단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것"이란 입장에서 '자살'을 반대한다. 이에 비해 불교는 자살을 고의적으로 자신에게 부과하는 죽음(자살)으로 그 기본 심리를 '생명경시'로 보고 있다. 생명을 그 무엇보다 존중하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보면 자살은 반불교적 행위다.
어렵게 받은 인간의 몸... 포기는 악업. 욕망소멸 못한 채 죽으면 윤회만 반복
생명존중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핵심적 개념이다. 불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계 중 제일 첫 째가 불살생계(不殺生戒)이고,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가르침은 불교의 생명존중 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많은 동물을 죽여 제사 지내는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사람은 물론, 동물 식물 조차도 함부로 훼손시키지 못하게 할 만큼 생명을 존중했다.
또 불교에서는 중생이 윤회하면서 인간의 몸을 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도 강조한다. 인간이 죽어 짐승이나 아귀, 지옥에 태어나는 것은 쉽지만 반대로 삼악도의 중생이 인간의 몸 받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려움에 대해 부처님은 "망망대해에 던진 널빤지의 구멍으로 100년에 한번씩 해수면에 올라오는 눈먼 거북이가 머리를 집어넣을 만큼 어렵다"고 비유하고 있다. 중생이 윤회하며 어렵게 받은 인간의 몸을 함부로 대하고, 해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윤회사상에 근거해도 사람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자살'은 반불교적이다.
김성철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는 "부처님은 자살을 선택하는 비구들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극복했는가를 물으며 결국 자살이 또 다른 악업을 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자이나교 등 일부에서 깨달은 자가 자살하는 관습이 있긴 하지만 부정관의 사례처럼 자살이 선한 동기와 상관없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물론. 부처님 생존 당시에도 교단 내에 자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분율>이나 <십송율>을 보면 몇 가지 사례가 나타난다. 부처님은 탐욕심을 다스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부정관(不淨觀)을 적극 권장했다. 하지만 그 결과 많은 비구들이 "몹시 몸을 싫어하고 근심하여, 혹은 칼로 자살하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고, 혹은 목을 매고 바위에서 떨어져 자살하며, 혹은 다른 비구들을 시켜서 자기를 죽이게끔 해서 자살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불살생계' 반드시 지켜야
이로 인해 60여명의 비구가 자살하게 되고, 부처님은 부정관이 탐진치(貪瞋痴)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함이지 자살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였다며 이후부터는 부정관 대신 아나파나(수식관)를 하게하고 불살생계를 설했다.
부처님께서 자살을 불인정하는 이유는 이외도 여러 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잡아함의 <발가리경><차마경><천타경> 등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비구들의 자살문제를 주로 다룬다. 이들 경전에서 부처님은 자살을 선택하려는 비구들에게 '자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극복했는가'를 묻는다. 집착이 남아있는데 현실의 고통을 못 이겨 도피처로 죽음을 선택하면 이는 윤회의 원인이 될 뿐이라는 지적이다.
자살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지만 소신공양 등 살인성인(殺身成仁) 자살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자살의 동기와 의도가 무엇이었느냐에 따라 선행과 악행의 평가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식을 구하기 위해 불길에 뛰어드는 부모, 아이를 구하기 위해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 위로 몸을 던지는 역무원들의 희생은, 비록 스스로 목숨을 버린 행위라도 숭고하기 때문이다.
박태원 울산대 철학과 교수는 "생명이 고귀하다해서 희생적 죽음의 긍정적 측면까지도 무조건 나쁘게 보아서는 안된다"면서 "자살의 동기가 어떤 맥락에서 이뤄졌느냐를 정확히 파악하고 자살의 문제를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욕망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려는 욕망'의 이면에는 항상 '존재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자리 잡게 마련이다. 자살의 경우 '존재하지 않으려는 욕망'의 표현으로 볼 수 있지만 불교는 인간을 타고난 욕망의 노예로 규정짓고 있지 않다. 업력(業力)이라 부르는 욕망은 비록 현세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인간에게는 언제든 그 업력을 바꾸고 넘어설 가능성과 힘이 있다. 자살이라는 욕망에 올가미를 매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제어하고 바꾸며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불교신문 2005호. 2004년 2월13일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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