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높임말 쓰고 생뚱맞은 '知人' '분' 유행.
연예인들 앞장서서 전파.
활자 친숙하지 않은 세대 틀린 어법 그냥 받아들여.
TV가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요 몇 년 새 몹시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는 엉뚱한 데다 존대를 하는 어법이다. 대관절 누가 언제 이런 엉터리 존대법을 시작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TV가 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커피 한 잔 주세요."
"3000원이세요."
"시럽 좀 넣어주세요."
"시럽은 저쪽 테이블에 있으세요."
장담컨대 이 커피집 직원은 잔돈을 거슬러주며 명랑하고 공손한 말투로 "여기 2000원이세요."라고 외칠 것이다.
국어의 존대법에는 주체존대와 객체존대, 상대존대가 있다. '주체존대'는 문장의 주체를 높이는 것으로, "선생님께서 오신다." 같은 존대법이다. '객체존대'는 문장의 목적어나 처소격 조사가 붙은 부사어를 높인다. "이 물건을 아버지께 전해드려라." 같은 문장이다. '상대존대'는 대화의 상대를 높이는 것으로 "별일 없으십니까?" 같은 어법이다. 요즘의 엉터리 존대는 높일 필요가 없는 사물을 존대하는 '주체존대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실로 방대한 영역에 이 주체존대의 오류가 퍼져 있다. 요즘 골프장에서는 OB(Out of Bounds·공이 골프 코스를 벗어나는 것)가 나면 캐디가 "OB세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내가 친 공이 OB가 난 것도 화가 나는데 캐디는 OB에다가 존대를 하고 있으니 짜증이 치민다고 한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물건 살 때, 음식 주문할 때, 안내 데스크에 가서 뭘 물어볼 때마다 "1만원이세요." "수육은 다 떨어지셨어요." "화장실은 왼쪽에 있으세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니 짜증이 나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에다 존대를 한다면 지하철 안내방송도 "다음 정차할 역은 시청역이십니다."로 바뀌어야 하고, 민방위훈련 때는 "지금은 훈련상황이세요."라고 방송해야 하며, 버스를 타며 교통카드를 갖다대면 "환승이세요!" 하는 안내가 나와야 할 것이다. 급기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웨이터가 "바닷가재 나오셨습니다. 일동 기립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코미디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상한 존대'의 또 다른 유형은 의존명사 '분'의 남용 또는 오용이다. '분'은 보통 '그분' '저기 계신 분' '손님 두 분'처럼 쓰이는 말인데, 요즘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유행이다. 얼마 전 프로야구 경기에서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고 시구(始球)를 해서 구설에 올랐던 여자 연예인은 "(옷을 준비해 준) 스타일리스트분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예인들은 마땅한 존대말을 찾기 어려운 모든 직함에다가 '분'을 붙인다. '매니저분' '코디분' '디자이너분'…. '분'이 '님'을 대신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 밖에 요즘 TV에서 많이 듣는 단어가 '지인(知人)'이다. 지인은 말 그대로 '아는 사람'이란 뜻이니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명사는 말보다는 글에 많이 쓰이는 문어체의 단어다. 스무살 안팎의 연예인이 TV에 나와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제 지인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뭔가 격(格)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남자가 자기 아내에 대해 '제 부인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행히도(?) 아직 연예인들에게까지 전파되지는 않았지만 각종 서비스센터 상담원들은 말끝마다 '부분'이나 '내용'이란 말을 붙인다. 이들은 "액정이 깨진 것은 유료로 교환해 드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인터넷 출장 수리는 전화로 예약하셔야 하는 내용이세요.(주체존대의 오류도 중복돼 있다)" 하는 식의 이상한 언어 습관을 갖고 있다. 이는 당장 이동통신회사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 보험회사의 고객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고전(古典)과 현대문학은 물론 신문도 익숙하지 않는 세대는 TV와 인터넷, 스마트폰에서 어법을 배운다. 이 세대는 많은 사람이 쓰는 말을 올바른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나 편집하고 가감할 수 있는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와 질문자가 채택하는 답이 곧 정답이 되는 네이버 '지식인'의 원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TV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개그맨도 좋고 아이돌 그룹도 좋으니, 맞춤법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식은 능력 있는 프로듀서들이 잘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겨루기' 같은 고상한 프로그램보다는 강호동이나 유재석이 등장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TV는 엉터리 어법을 출연자들의 말과 자막으로 전파한 잘못도 있으니, 이를 바로잡을 책임도 있지 않은가.
한현우 기획취재부 차장. 입력 : 2011.08.04 23:04 / 수정 : 2011.08.05 03:59
원본 글을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넋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밭다리(바깥다리)와 덧걸이... (0) | 2011.09.13 |
---|---|
짜장면도 이제는 표준어 (0) | 2011.09.01 |
해외여행 시 모르면 큰 코 다칠 관세 상식들 (0) | 2011.08.10 |
노래가사? 노랫가사? 노랫말. (3) | 2011.07.23 |
여름철 피부관리법 (0) | 2011.07.22 |